목적은 수단을 정당화하지는 못한다. 그러나 나는, 목적을 위해서는 정당하지 못한 수단을 동원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목적달성 후 정당하지 못했던 수단에 대해 책임을 진다는 전제하에.

그런 면에서 나는 가장 이상적인 지도자는 조조 같은 스타일이라고 본다. 이를테면 군량부족에 시달리던 조조가 군량책임자였던 왕후에게 누명을 씌우고 처형함으로써 군대의 사기를 살리는 사례 같은.
비슷한 입장으로는 제갈량의 읍참마속 고사조차도, 인사를 잘못한 본인의 책임을 부하장수에게 전가하고 대신 군기를 다잡는다는 해석이라든가. (물론 그런 사건이 실제 역사인지는 차치하고.)
물론 이런 건 개인단위의 도덕률로는 용납되지 않는 사례이겠으나, 집단단위의 도덕률은 또다른 의미이니까. 음. 군주론에 나올 법한 이야기인 듯.
나는 노무현 전 대통령(요즘은 꼬박꼬박 전대통령이라는 칭호를 안붙이면 왠지 혼나는 분위기인 듯)을 그닥 마뜩치 않아 하는데, 물론 그가 그나마 다른 정치인들에 비하면 나은 수준임은 인정하지만, 그의 지난 통치행위 자체가 이런 신격화의 대상이 될 만큼은 아니었다는 생각이다.
공과가 있다고는 하지만, 그의 공은 지나치게 개인적,감성적인 부분이었고, 그의 과는 사회적,집단적인 부분이었다. 그러니까 그가 권위주의를 벗어났다거나, 언론권력과의 의로운 싸움을 했다거나 하는 공은, 신자유주의로의 투항이나, 노동운동의 탄압같은 과랑 비교해본다면 내 이런 생각이 과히 틀리지 않았다고 본다. 개인으로서의 노무현은 훌륭했을지 모르겠으나, 국가의 통치자로서는 적절치 못했다는 뜻이다. 돌팔매가 무서워서 좀더 순화시켜보자면, 아무튼 이때, 이곳에 있을 대통령은 아니었다. 글타고 이회창이나 권영길이어야만 했다는 뜻은 아니지만.
역사상 그랬던 지도자들이 한 둘이 아니었겠다만, 나는 가장 비슷했던 이로 예수를 들고자 한다. 그의 사적이 역사적 사실이었건 아니었건간에, 예수의 삶이나 철학은 분명 훌륭한 건 사실이다. 그 철학을 녹여 담은 기독교도 나쁜 건 아니다. 개별 교인도, 세상에 뿌리부터 나쁜 사람이 어디 있겠나.
헌데 이 세가지 – 예수, 기독교, 기독교인 – 를 한데 버무리고 나면 그 결과물은 생각만큼 그닥 좋지 않다. 노무현, 노무혀니즘(그 실체가 뭐든간에), 노빠(혹은 지지자)를 한데 버무린 결과물도 딱 그정도이다. 대략 좋지는 않았다.
그러므로, 평소대로라면 이때쯤이면 슬슬 내 안의 가장 저열한 변덕이 시키는 대로 시의적절한 쿨게이질을 할 타이밍이긴 한데, 이번 만큼은 그냥 가만히 있는 이유는, 고인에 대한 예의나 그런 것 때문만은 아니고, 크게 보아 목적을 정당화시키는 데 적절한 떡밥 – 수단인 듯 하여.
현실적으로는 별로 그렇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노무현은 진보와 양심의 아이콘이 되어, 이 나라 최고 난제 중의 하나였던 박정희컴플렉스의 유일한 대항마가 될 가능성이 보인다는 것이 요즘의 시국 관전 포인트. (차차기 선거 즈음 누군가는 노무현의 적자임을 내세우며 출사표를 던질 지도… ) 더불어 수구반동의 앙샹레짐 체제의 돌파구가 될 수 있을 것 같다는 점. 그가 살아있었고, 대통령이었을 때에는 그에게 기대했었으나 배신당했던 가치들에 대해, 역설적이게도 그가 죽음으로써 그의 신화화에 힘입어 새로운 생명력을 부여받을 조짐이 보이니, 이 또한 예수에 비견될 만하겠다.
고로, 때로는 쿨게이질을 닥치고 조용히 판이 짜여 돌아가는 것을 음흉한 미소로 지켜보는 것이 필요할 때도 있는 법이다.
하긴, 근데 이것 역시 2MB와 앙샹레짐이라는 거대악이 존재하는데다가 스스로 멍청하기까지 해서 가능한 멍석이니 이야말로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으면 딱 좋은 타이밍. 과연 떡을 먹을 수 있게 될른지야 아직 모르겠지만, 일단은.
ps. 나 자신이 쿨게이의 혐의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쿨게이들을 싫어하는 이유는, 그들의 학자연한 태도들이 그저 송양지인에 불과한 것은 아닌가 싶을 때가 많기 때문이다. 내가 학자라면 나역시 ‘팩트골룸’에 목을 매겠지만, 나는 저열한 음모가에 가까운지라 사실 크게 보아 목적에 부합한다면 팩트따위는 개나 줘도 된다고 생각. 그렇다고 해서 내가 나서서 노무현 신격화를 위한 유언비어를 유포할 정도까지는 아니고. 그저 이용할 수 있을만큼 이용하면 된다는 생각?
카테고리: 생각하다

0개의 댓글

aransdad · 2011-01-12 06:06

@안녕하세요 – 2009/06/18 04:19
조금씩 옮기고 있습니다. 거기 것만이 아니라, 그 전의 블로그들까지도요. 다만 시간이 날 때마다 조금씩 옮기는 중이라서 시간이 걸리네요. 관심보여주셔서 감사합니다.

안녕하세요 · 2011-01-12 06:06

나는 이래서 님의 글이 좋습니다.

저 눈썰미 있죠?

아주 우연히 들어가게 된 eounia 블로그.

글 하나만 보고도 금방 알아 차렸다는 거.. 흐흐흐

부탁하건데 제발 본인의 글의 소중함 아셔서

버리지 말고 꼭 챙겨오셨으면 해요.

부탁입니다.

민노씨 · 2011-01-12 06:06

대체로 저와 입장이 같으시네요. : )

그런데 왜 차기가 아닌, "차차기"라고 굳이 시차를 넓게 잡으셨는지요? 저로선 '차기'에서, 그러니 3년 반 뒤에 노무현이라는 상징이 되살아나거, 활용되지 못하면 그 뒤에 다시 노무현이라는 상징이 살아나는 것은 어렵지 않나 싶습니다. 조중동으로 상징되는 담론권력은 어떤 '사건'을 '연기시키는 메카니즘'을 극도로 발전시켜오고 있다고 생각해서요.

3년 반동안의 상징화작업(노무현에 대한 비판적인 재평가 작업을 포함해서요)의 성공여부(?)에 그렇게 크게 기대를 하지는 않습니다만, 최소한 '재료'가 마련되었다는 점에서는 노무현 대통령은 자기 스스로를 정말 정치적인 맥락 속으로 깊이 각인시킨 것 같고, 그 점에서 그의 정치적인 승부사로서의 역량은 참으로 탁월한 것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물론 그 죽음에 대해선 안타깝기 짝이 없습니다만… 그 죽음은 자연인의 죽음, 어떤 실존의 죽음이라기 보다는 상징의 죽음이면서, 그 상징의 부활이라는 의미라서.. 인간적인 연민과 감정이입이 극도로 치솟아 오르는 와중에(물론 그건 그 쇠락의 이미지에 대한 감정이입이겠고, 압도적인 권력의 야만에 의해 증폭되는 그런 것일텐데요) 또 다른 한편으론 그의 죽음이 어떤 희망의 이미지와 겹쳐지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댓글이 너무 길어서 죄송합니다. 😀

그냥 가볍게 읽어주시는 것으로 족하고, 굳이 답글을 남기지는 않으셔도 무방합니다. 물론 제가 이런 말을 해서 답글을 남기고 말고 하실 이바닥님은 아니시지만요. ㅎ

익명 · 2011-07-19 10:06

본인이 조조이길 원하는 마음에 군주론을 옹호하실 거로 생각합니다. 혹시 본인이 왕후여도 같은 생각을 가질 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자신이 믿고 따르던 사람에게 죄를 뒤집어 씌워져서 사형을 받을 의향이 있으신가요? "내가하면 로멘스 남이하면 불륜"이란 글을 좀 더 그럴듯 하게 포장한 것 으로 밖에 보여지지 않는게 이 아닌가 생각되는군요. 군주론은 승자의 페이지를 정당화 하기 위한 도구가 아니던가요?

aransdad · 2011-07-19 10:10

@익명//개인단위의 도덕률과 집단단위의 도덕률은 다를 거라고 생각합니다. 조조나 왕후에 대한 개인적인 도덕평가를 하려는 글은 아니었고, 글에도 써놨듯이, 개인적인 도덕률로는 용납되지 않는 사례일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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